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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에이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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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에이 지진은 1707년 일본에서 발생한 대규모 지진으로, 난카이 해곡에서 일어난 연동형 지진으로 추정된다. 지진 규모는 M8.4에서 M9.3 사이로 추정되며, 도카이도, 기나이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진동이 감지되었다. 지진으로 인해 쓰나미가 발생하여 일본 태평양 연안과 내해, 제주도 등지에 피해를 입혔으며, 최소 2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후지산의 분화를 유발하고, 쌀값 폭등과 재정난을 초래하는 등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피해 지역에는 재해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난카이 트로프 거대 지진의 반복성을 고려할 때, 향후 발생할 지진과 쓰나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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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7년 일본 - 호에이 대분화
    호에이 대분화는 1707년 후지 산에서 발생한 대규모 분화로, 호에이 지진 직후 플리니식 분화의 특징을 보이며 막대한 화산재해와 사회 경제적 영향을 초래했고 후지 산 동남동쪽에 새로운 화산 분화구를 형성했다.
호에이 지진
지도 정보
호에이 지진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지도
기본 정보
명칭1707년 호에이 지진
일본어 명칭宝永地震 (호에이 지신)
발생 정보
발생 날짜1707년 10월 28일
발생 시간13시 45분경 (일본 표준시)
진앙도카이도난카이도 해역
진앙 좌표33.2° N, 135.9° E
깊이알 수 없음
단층난카이 해구
규모
규모모멘트 규모 8.7
표면파 규모8.6
기타 규모일본 기상청 규모 8.4
진도
최대 진도진도 7
진도 7 지역도토미 후쿠로이, 미카와 노다, 가와치 후세, 도사 무로쓰・스쿠모 오시마
쓰나미
최대 높이25.7m (도사 구레)
피해 정보
영향 지역주부 지방, 간사이 지방, 시코쿠, 규슈
사망자4,900명 – 21,000명
지질학적 영향
유형해구형 지진, 역단층형
관련 사건후지 산 최대 규모 분화 유발

2. 에도 시대의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

필리핀 해판이 유라시아판 아래로 가라앉는 난카이 해구는 많은 지진을 유발하며, 그 중 일부는 거대 지진 유형이다. 난카이 거대 단층은 다섯 개의 뚜렷한 세그먼트(A-E)로 구분되며, 지난 1,300년 동안 단독으로 또는 함께 반복적으로 파열되었다.[8][9][10] 난카이 거대 지진은 비교적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 쌍으로 발생하는 경향이 있는데, 1944년과 1946년, 그리고 1854년에 발생한 두 지진이 그 예이다. 두 경우 모두 북동쪽 세그먼트가 남서쪽 세그먼트보다 먼저 파열되었다.[11] 1707년의 호에이 지진은 역사적 기록에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시에 또는 매우 짧은 시간 간격으로 발생했다.

2. 1. 1605년 게이초 지진

난카이 해곡을 진원역으로 생각되는 거대 지진으로, 에도 시대에는 호에이 지진 외에도 1854년에 연발한 안세이 도카이 지진안세이 난카이 지진이 알려져 있다. 또한, 호에이 지진 4년 전(1703년)에는 연호를 "호에이"로 개원하게 한 사가미 해곡 거대 지진 중 하나인 겐로쿠 지진이 발생했다.[28][29]

1605년 게이초 지진도 과거에는 호에이 지진처럼 도카이도·난카이도에 걸쳐[30], 진원역이 거의 호에이 지진에 필적하는 쓰나미 지진으로 생각되었다.[31] 그러나, 이를 난카이 해곡을 따른 거대 지진으로 보기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으며, 난카이 해곡을 따른 지진이 아니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32][33] 실제로 게이초 지진의 진원역이 난카이 해곡 전역에 걸쳐 있다면, 이는 불과 100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초거대 지진을 일으킬 에너지가 축적되었다는 것이며, 미래의 초거대 지진의 추정치도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만약 게이초 지진이 이즈 오가사와라 해구를 따른 곳이 진원역이라면, 지진동이 약한 점, 뒤틀림 축적 시간의 문제는 해소된다.[34]

안세이 지진까지의 재래 간격 147년은 종래의 정설에서는 1361년 쇼헤이 지진 이후의 난카이 해곡 거대 지진의 평균 재래 간격 117년보다 길다고 생각되어 왔지만, 안세이 지진에 관해서는 "호에이 지진의 뒷정리 지진"이었을 가능성도 생각되며, 이 재래 간격 147년은 난카이 해곡을 따른 거대 지진으로는 오히려 짧은 부류에 속한다는 견해도 있다.[33] 이 지진에 대해 기록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문서는 막부 말기에 발생한 안세이 지진에 비해 양과 질 모두 훨씬 미치지 못하며, 게다가 안세이 지진 후에 당시 사람들이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술한 것도 적지 않아, 지진 당시에 기록된 사료는 적다.[35]

2. 2. 1707년 호에이 지진과 1854년 안세이 지진

난카이 해곡에서 일어나는 거대지진은 에도 시대에 호에이 지진 외에도 1854년(가에이 7년) 연달아 일어난 안세이 도카이 지진안세이 난카이 지진이 있다. 호에이 지진 4년 전인 1703년에는 연호를 '호에이'로 개원하게 만든 사가미 해곡 거대지진겐로쿠 지진이 일어났다.[231][232]

1605년(게이초 9년)에 일어난 게이초 지진도 한때는 호에이 지진처럼 도카이에서 난카이에 걸친[233] 진원지가 호에이 지진 급의 초거대 해일지진으로 추정되었다.[234] 하지만 이 경우 에너지 축적 속도가 너무 빠르며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이라기에는 모순되는 점이 많아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236][237] 게이초 지진이 기록상 느낀 지진동이 매우 약하며 에너지 축적 시간의 문제 때문에 이즈-오가사와라 해구에서 일어난 지진이라는 설이 높다.[235]

또한 안세이 지진은 "호에이 지진의 광의적 여진"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이 경우 호에이 지진과 안세이 지진 사이 간격인 147년은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 발생 간격 중 제일 짧은 간격이라고 말한다.[237] 호에이 지진을 기록한 현존하는 고문서는 막말 시기 발생한 안세이 지진 때와 비교하여 양과 질 모두 떨어지며 게다가 사료 중 대부분이 안세이 지진 이후 당대 사람들이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록한 내용도 훨씬 많아 호에이 지진 당시에 적힌 기록은 별로 없다.[238]

2. 3. 기타 관련 지진

난카이 해곡에서 일어나는 거대지진으로는 에도 시대에 호에이 지진 외에도 1854년(가에이 7년) 연달아 일어난 안세이 도카이 지진안세이 난카이 지진이 있다. 호에이 지진 4년 전인 1703년에는 연호를 '호에이'로 개원하게 만든 사가미 해곡 거대지진겐로쿠 지진이 일어났다.[231][232]

1605년(게이초 9년)에 일어난 게이초 지진도 한때는 호에이 지진처럼 도카이에서 난카이에 걸친[233] 진원지가 호에이 지진 급의 초거대 해일지진으로 추정되었다.[234] 게이초 지진의 진원지가 난카이 해곡 전역이 맞다면 약 100여년 간격으로 초거대지진이 돌아와 에너지가 빠른 속도로 축적되다 방출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향후 미래에 올 수 있는 초거대지진의 예측에도 도움을 줄 수 있었다.[235] 하지만 이 경우 에너지 축적 속도가 너무 빠르며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이라기에는 모순되는 점이 많아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236][237] 기록상 게이초 지진에서 느낀 지진동이 매우 약하며 에너지 축적 시간의 문제 때문에 이즈-오가사와라 해구에서 일어난 지진이라는 설이 높다.[235]

또한 안세이 지진은 "호에이 지진의 광의적 여진"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이 경우 호에이 지진과 안세이 지진 사이 간격인 147년은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 발생 간격 중 제일 짧은 간격이라고 말한다.[237] 호에이 지진을 기록한 현존하는 고문서는 막말 시기 발생한 안세이 지진 때와 비교하여 양과 질 모두 떨어지며 게다가 사료 중 대부분이 안세이 지진 이후 당대 사람들이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록한 내용도 훨씬 많아 호에이 지진 당시에 적힌 기록은 별로 없다.[238]

3. 지진

혼슈 섬 남부 해안은 난카이 해구와 평행하게 뻗어 있으며, 이곳은 필리핀 해판이 유라시아판 아래로 섭입하는 곳이다.[8][9]수렴 경계에서의 움직임은 많은 지진을 유발하며, 그 중 일부는 거대 지진 유형이다. 난카이 거대 단층은 독립적으로 파열될 수 있는 다섯 개의 뚜렷한 세그먼트(A-E)를 가지고 있으며,[10] 비교적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 쌍으로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1707년의 지진은 역사적 기록에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동시에 또는 매우 짧은 시간 간격으로 발생했다.

1707년 지진으로 4,900명에서 21,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29,000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최소 1건의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는 시즈오카현의 오야 산사태였다.[12] 일본 3대 산사태 중 하나인 이 산사태는 1.8km2 면적을 추정 1.2억m3의 토석류로 덮었다.[13] 나라현 분지에서는 지진으로 인한 토사 액상화의 증거가 나타났다.[14]

1707년 지진의 규모는 1854년 도카이 및 난카이 지진보다 컸다.[15] 파열 길이는 관측된 쓰나미 모델링과 쓰나미 퇴적물 위치를 통해 추정되었는데, 총 파열 길이가 675~700km 범위에서 더 잘 일치했다.[16][17]

본진동으로부터 약 16시간 후인 다음 날 새벽 6시경(JST)에 규모 7.0의 강진이 후지노미야 부근에서 발생했다.[18] 1708년 2월 13일 10:00~12:00 (JST)에는 기이 반도 연안에서 진앙을 둔 대규모 여진이 발생했다.[18]

지진으로 인한 응력 변화는 화산 폭발을 유발할 수 있는데, 호에이 분화는 지진 발생 49일 후인 1707년 12월 16일에 발생했다.[1]

3. 1. 지진동

기나이, 도카이도, 난카이도 지역에서 격렬한 지진이 느껴졌다. 지진을 느낀 지역은 매우 넓어 광범위한 가옥 붕괴가 일어난 강진 범위가 200(약 790km)에 달했으며,[227] 에조를 제외한 일본 오기칠도 전역에서 큰 흔들림을 느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241][242]

도사국에서는 지진 당일 완연한 가을 날씨로 쾌청하면서 옷이 피부에 달라붙을 정도로 더웠다고 한다. '만변기'(万変記, 홍제필기(弘列筆記))에는 "아침부터 바람도 거의 없고 하늘도 매우 청명해서 구름 한 점 없었으며 옷이 달라붙을 정도로 매우 더웠는데 미시 경 동남쪽에서 엄청나게 울리더니 대지가 흔들리고 천지도 하나가 되는 듯 싶더니 땅이 2-3척으로 쪼개져서 물이 분출되고 산사태가 났으며 가옥이 무너지는 게 마치 장기말들이 잇따라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43]

도사국 고치(현 고치현 고치시)에서는 '만변기'에 진동 시간이 "반시간 정도 계속 흔들리다 잠시 멈췄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도사국 다카오카군 우사촌(현 도사시 우사)에서는 '금석대변기'(今昔大変記)에 "미상각에 일어난 지진은 같은 시 중각(미중각)이 되어서야 그쳤다"라고 기록되는 등 30분에서 1시간 가까이 진동이 계속되었다는 표현이 많다.

본진의 흔들림을 시간으로 확실하게 적은 기록으로는 다카오카군 사카와초(현 사카와정 고오)에서 '호에이 지진기'(宝永地震記)에 "걷는 거리로 대략 200보 정도를 넘길 정도로 약간 오랫동안 진동했다"(대략 2분)는 기록이나 교토에서 '기희공기'(基煕公記)에 기록된 "지진의 진동이 길을 7-8정보 정도 걸을 정도로 흔들렸다"(약 10분)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도 "이 때는 대략 1시간을 6개로 쪼갰을 때 2번 정도 길이로 그 하나는 그렇게 짧지 않았다"(시마 지역 기록, 대략 20분), "차 4-5잔 정도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이마바리번 기록), "대략 2-3정보 정도 걸을 수 있는 거리만큼의 지진"(오사카 기록, 24-36분), "미1점보다 더 길었다. 신전각 때까지 대지진이 있었다"(오사카 기록, 대략 2시간)이라는 매우 긴 지진 기록도 있다.[245][246]

1707년 지진의 규모는 여러 관측 결과에 따르면 1854년 도카이 지진 및 1854년 난카이 지진보다 컸다. 고치현 무로토곶의 융기는 1707년에 2.3m로 추정되는 반면 1854년에는 1.5m였으며, 가와치 평원에 JMA 진도 계급 6~7의 진도 구역이 존재하고, 해당 쓰나미의 피해 정도와 침수 높이, 그리고 나가사키와 한국의 제주도와 같은 먼 지역의 쓰나미 기록 등을 근거로 한다.[15]

파열 길이는 관측된 쓰나미 모델링과 쓰나미 퇴적물 위치를 통해 추정되었다. 4개 구역이 파열된 것을 기반으로 한 초기 추정치는 605km였지만, 해구 서쪽 끝에서 발견된 쓰나미 퇴적물을 설명하지 못했다. 소위 휴가나다 구역의 일부인 남서쪽 끝 부분의 추가 지역을 포함시키자 총 파열 길이가 675~700km 범위에서 더 잘 일치했다.[16][17]

본진동으로부터 약 16시간 후인 다음 날 새벽 6시경(JST)에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했으며, 진앙은 후지노미야 부근이었다. 이 지진은 에도, 도야마시, 나고야에서 강하게 감지되었다. 무라야마 센겐 신사 영지에서는 모든 가옥이 붕괴되었으며, 후지노미야와 도카이도 노선에서 사찰과 신사 건물이 붕괴되고 사망자가 발생했다.[18]

1708년 2월 13일 10:00~12:00 (JST)에 기이 반도 연안에서 진앙을 둔 대규모 여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은 교토와 나고야에서 강하게 감지되었으며, 쓰나미를 발생시켰다. 기이에서는 염전이 침수되었고, 이세시에서는 야마다, 후키아게초, 히토츠보키에 영향을 미쳐 미야가와 강의 제방이 붕괴되었다.[18]

3. 2. 진원지

필리핀해판이 침강하는 난카이 해곡 지역의 도카이 지진(도난카이 지진의 진원지 포함)과 난카이 지진이 연쇄적으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연동형 지진으로 추정되며,[247] 일본 중앙방재위원회의 "도난카이, 난카이 지진 등에 관한 전문조사회"에서는 도카이·도난카이·난카이 지진(3연동지진) 모델에 부합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도카이 지진난카이 지진이 시간 차이를 두고 일어난 2개의 지진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도쿄대 연구에서 규슈 지역과 간토 지역의 지진 발생 시각 기록을 분석한 결과 둘의 시간 차이가 거의 없었다.[248]

1854년 안세이 도카이 지진과는 달리 호에이 지진의 경우에는 진원지에 스루가만 해역 안쪽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설이 대세이다.[249] 또한 단순히 안세이 시기의 2개 지진을 합친 것만으로는 쓰나미 규모 등을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250] 지구 시뮬레이터의 계산 결과 규슈 지역의 쓰나미와 쓰나미 호수 흔적은 진원지를 아시즈리미사키곶 서쪽 휴가나다 지역까지 더 넓혀야 설명할 수 있다고 나오며, 이 경우 진원지 길이는 600km를 넘으며 최대 700km까지 이어진다.[251][252][253][254][255]

이렇게 진원지가 매우 넓은 초거대지진[256]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에서 현대 관측시기 관측되지 않았지만, 2011년 3월 11일 규모 M9.1의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관측되면서 실제로 초거대지진이 일어나는 매커니즘을 자세히 관측할 수 있었고,[257][258] 이후 연구에서도 과거 난카이 해곡에 호에이 지진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 규모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지진 흔적이 발견되었다.[259]

고야마 준지(小山順二, 2013) 교수는 호에이 지진이 난카이 해곡의 해곡 축 방향을 따라 수 차례 분기적으로 단층파괴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했으며, 이에 따르면 대륙판과 해양판 양쪽에서 2개의 진원역 분기에 걸쳐서 단층파괴가 일어난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과는 발생 과정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난카이 해곡은 평상시에는 지진공백역이며 판이 매우 낮은 각도로 섭입하기 때문에 판 사이 마찰력이 매우 높으며, 이렇게 원래 '칠레형'으로 분류된 한겹의 진원역 세그먼트의 섭입대에서 일어난 지진으로는 1700년 캐스케이디아 지진, 1960년 발디비아 지진, 2010년 칠레 지진이 있다.[258]

지진 피해가 민가보다는 사찰과 같은 대형 구조물이 잘 무너지는 등 더 컸기 때문에 장주기 지진동이 매우 강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때문에 진원지를 안세이 지진보다 더 육지 쪽에 가까운 해역으로 두며 동쪽 끄트머리를 남쪽인 제니스 섬 해역으로 두는 설도 있다.[250]

3. 3. 지진 규모

지진 규모 추정치는 M8.4에서 M9.3까지 다양하지만, 지진계가 없던 시절 고문서에 기록된 각지의 피해를 기반으로 한 추정 진도와 쓰나미 규모로 추정하여 계산해야 하는 역사지진이며 규모 포화 현상이 일어나는 거대지진이기 때문에 확정할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존재한다.

카와스미 히로시(河角廣, 1951) 교수는 규모 Mk=7.으로 가정하고[260] 규모 M이 대략 8.4일 것이라 추정했다. 우사미 타쓰오(宇佐美龍夫, 1970) 교수는 히로시 교수의 규모와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간의 관계를 고려하여 쇼와 도난카이 지진보다 규모가 크므로 M8.4 정도라고 추정했으나, 이 당시에는 모멘트 규모(Mw)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1960년 발디비아 지진도 M8.5로 알려져 있었다.[261] 이후 우쓰 도쿠지(宇津徳治, 1999) 교수는 규모를 M8.6으로 상향했으나,[262] 자세한 계산식은 쓰지 않았고 안세이 도카이 지진의 M8.4와 안세이 난카이 지진의 M8.4의 에너지를 단순 합산해 맞춘 것으로 추정된다.[263]

안도(安藤, 1975) 교수는 3개의 단층 모델을 가정하였고,[264][265] 아이다(相田, 1981) 교수와[266][267] 하토리(羽鳥, 1974-81) 교수는 추정 쓰나미 높이를 통해 난카이 해곡의 5개 단층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가정해 모멘트 규모 Mw8.7이라고 추정[268]했지만, 이것도 안세이 도카이 지진과 난카이 지진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으로 이 안세이 도카이/난카이 지진의 단층분석도 쇼와 도난카이 지진쇼와 난카이 지진을 바탕으로 추정한 값이었다.[269] 안나카(安中,2003) 교수는 4개 단층을 가정한 지진 모델을 만들었으며,[270] 고무라(古村, 2011) 교수는 안나카 교수의 모델을 휴가나다 방면까지 연장한 지진 모델을 만들었다.[251][271]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기준 진도5의 분포 면적을 타원에 가깝다고 가정하고 S5=π×420×330 km2로 둔 무라마쓰(村松, 1969) 교수의 식[272]을 토대로 규모를 추정하면 M8.8이 나오며, 진도6의 분포 면적을 타원에 가깝다고 가정해 S6 =π×350×250 km2로 두어 계산하면 규모가 대략 M8.9가 나온다.[228] 일본 내각부의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의 모델 검토회"에서 작성한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의 장주기 지진동 보고서"에서는 단층 모델에 따라 Mw8.87로 추정하였다.[273]

일본 산업기술총합연구소의 이시카와 유조는 2011년 일본 지진학회에서 고문서에 기록된 추정 여진 지역과 진도6 이상을 느낀 지역의 넓이를 토대로 호에이 지진의 규모를 각각 M9.1, M9.3으로 추정했다고 발표했다.[275][276] 또한 위의 아이다 교수의 모델에서는 제주도에 닥친 쓰나미를 설명할 수 없으며, 무라마쓰 교수의 모델에서는 호에이 지진과 비교할 수 있는 지진의 진도 분포 데이터가 매우 부족한 시대의 지진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지진의 규모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277]

1707년 지진의 규모는 여러 관측 결과에 따르면 1854년 도카이 및 난카이 지진보다 컸다. 고치현 무로토곶의 융기는 1707년에 2.3m로 추정되는 반면 1854년에는 1.5m였으며, 가와치 평원에 JMA 진도 계급 6~7의 진도 구역이 존재하고, 해당 쓰나미의 피해 정도와 침수 높이, 그리고 나가사키와 한국의 제주도와 같은 먼 지역의 쓰나미 기록 등을 근거로 한다.[15]

파열 길이는 관측된 쓰나미 모델링과 쓰나미 퇴적물 위치를 통해 추정되었다. 4개 구역이 파열된 것을 기반으로 한 초기 추정치는 605km였지만, 해구 서쪽 끝에서 발견된 쓰나미 퇴적물을 설명하지 못했다. 소위 휴가나다 구역의 일부인 남서쪽 끝 부분의 추가 지역을 포함시키자 총 파열 길이가 675~700km 범위에서 더 잘 일치했다.[16][17]

3. 4. 피해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기준 진도 6 이상을 느낀 지역은 스루가국 서쪽 도카이 지방 연안부터 오사카 평야, 나라 분지, 기이반도, 시코쿠, 규슈 동부 분고국, 휴가국까지 이어졌다. 이외에도 가이국, 시나노국 등 일본 내륙지역과 이즈모국 기쓰 지방 등 동해 연안 지역에서도 일부 진도 6으로 추정되는 지역들이 있었다. 에도, 교토에서도 진도 4-5 정도를 느낀 것으로 추정되나 피해는 비교적 가벼웠다. 교토에서는 히가시혼간지 사당이 무너지고[278] 도지 오층탑소린이 떨어졌으며,[279] 에도 히로사키번 영주 저택이 일부 무너졌다.[280] 나라도다이지에서는 동남원의 담이 무너지고 도다이지 영분 가옥 349채 중 18채가 무너졌다.[281]

지진의 흔들림으로 인한 피해는 도카이도, 이세만 연안, 기이반도에서 가장 컸다. 후쿠로이슈쿠 건물이 완전히 무너졌으며 시라스카슈쿠도 건물이 무너진 후 쓰나미가 덮쳐 유실되었다. 유이슈쿠, 구노잔, 슨푸, 오카베슈쿠, 후쿠로이슈쿠 등은 막부에 낸 피해보고서에 "4일 낮 8시와 5일 아침 6시 경 2차례의 대지진이 일어나"라고 쓰여 있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후지노미야 지진의 피해와 구별이 어렵다. 스루가국에서 도사국까지 주택 붕괴 피해가 보고되었으며 이 외에도 이즈모국, 에치젠국, 시나노국 등 일본 오기칠도 전역에서 피해가 보고되었다.[284]

도카이도의 피해는 스루가만 서쪽에서 더 컸다.[285] 지진 8일 후 막부는 도카이도 오십삼차 슈쿠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감독관 2명을 파견하였다. 재해 복구에는 막부 직할령인 천령슈쿠바 복구에 마쓰시로번사나다씨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막부 내각 내에서 지진담당을 맡게 된 간조부교인 오기와라 시게히데가 공사금 추산액을 보여주어 재건축을 지시하였다. 공사 등 복구 이후 실무는 막부 지정 에도의 도급상인들이 맡았으나 마을 복구 작업도 같이 맡게 되었다. 슈쿠의 역참 건물과 길을 전부 복구하는 데 쓰인 금액은 금 14,391과 은 80에 달했다. 복구 비용은 전부 사나다씨가 냈지만 피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막부가 직접 구원하여 복구해준 것이라고 인식하였다.[286]

도사국에서는 가옥 4,866채가 붕괴되었으며 고치, 스자키 등 도사 각지 지역에서 액상화현상이 일어났고 나카무라 지역에서는 집이 1/3 이상 무너졌고 스쿠모 지역에서는 화재도 일어났지만 전체적으로 지진 화재 피해는 적었다.[287] 지진 후 일본 각지의 번과 영주들은 성, 집, 마을, 가옥 피해 등을 막부에 보고하였으며 야나기사와 요시야스가 '낙만당년록'(楽只堂年録)에 각지의 피해 보고를 종합해 기록했다.[288]

일본 각지의 성곽 피해
가도돌담 피해 및 붕괴망루, 담, 문의 피해
기나이다카토리성, 기시와다성고리야마성, 요도성, 다카스키성, 아마가사키성
도카이도다나카성, 요코스카성, 오카자키성, 요시다성, 다하라성, 아노쓰성, 도바성, 가메야마성, 우에노성고후성, 슨푸성, 하마마쓰성, 가리야성, 나고야성, 이누야마성, 나가시마성
도산도다카노성, 이이다성, 이와무라성, 구와나성, 오가키성, 히코네성마쓰시로성, 마쓰모토성, 다카시마성, 가노성, 제제성
호쿠리쿠도오바마성
산요도아카시성, 아코성후쿠야마성
난카이도다카마쓰성, 마루가메성, 이마바리성, 오즈성, 우와지마성와카야마성, 고치성
사이카이도후나이성, 우스키성, 사이키성, 오카성, 노베오카성기쓰키성, 히토요시성



기이국의 신구우성은 천수각이 동쪽으로 기울어지는 피해를 입었다.[289] 지진 후 일본 각지의 번들은 막부에게 성 보수 허가를 청원하였는데, 시나노국의 스와번은 음력 11월 9일(1707년 12월 2일), 이요국의 오즈번은 음력 11월 26일(1707년 12월 19일)에 각각 성 담벼락의 보수 허가를 제출하고 윤허받았다.[290][291]

오와리번의 무사인 아사히 시게아키의 일기인 앵무룡중기(鸚鵡籠中記)에서는 나고야성의 세 번째 성곽에 불이 나고 성 아래 부케야시키(무사의 집)의 담장 70-80%가 무너졌으며 땅이 갈라져 진흙이 솟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다.[292][293]

오사카성은 망루와 성문 일부가 손상을 입었지만 오사카성 아래 니시요코보리가와, 에도보리가와, 노소미나미시로보리, 이타치보리, 호리에, 기타노신치, 신사이바시 지역 주변은 건물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조리 무너졌다고 기록되어 있다.[294] 히로시마번에서는 술집과 간장가게들의 통들을 절반 넘게 잃었고 히로시마성 해자의 물이 넘쳐 거리가 물에 잠기고 돌벽도 무너졌다.[295]

호에이 지진으로 일본 각지의 산체 자체가 무너지거나 산사태가 일어났다.[296] 아베강 상류가 1억 2,000만 m3에 달하는 오야쿠즈레의 산체 붕괴로 막혀버렸고[297] 후지강도 시라토리산의 붕괴로 강이 막혀 폐색호가 만들어졌고 3일 후 붕괴되었다.[228] 사누키국에서도 고켄잔의 일부가 큰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292][298] 무로토곶 근처에서는 사키하마강 상류의 가나키쿠즈레가 붕괴되는 일이 일어났다.[299] 오치(현 고치현 오치정)에서는 마이하나가 붕괴하여 니요도가와강을 4일간 막아버리다 무너진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고도 61m 이하 장소에 집을 짓지 말라"는 내용의 비석이 마을 몇 군데에 있다.[300][301]

지진으로 4,900명에서 21,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29,000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최소 1건의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는 시즈오카현의 오야 산사태였다.[12] 일본 3대 산사태 중 하나인 이 산사태는 1.8km2 면적을 추정 1억 2천만 m3의 토석류로 덮었다.[13] 나라현 분지에서는 지진으로 인한 토사 액상화의 증거가 나타났다.[14] 지진과 해일로 인해, 총 사망자 수는 최소 2만 명 이상, 논밭 손실은 30만 석 이상, 배 유실 및 손상은 3,000척으로 추정된다[82]

3. 4. 1. 개요

이즈 시모다에서는 쓰나미로 집 925채 중 857채가 떠내려갔고 55채는 지진으로 반쯤 무너졌다. 시모다는 겐로쿠 지진 당시에도 쓰나미 피해를 입었으나 이때는 492채가 유실되었다. 시모다시에 전해 내려오는 '시치겐초'(七軒町) 전설은 옛 지진 당시 마을 전체에서 집이 7채만 남고 전부 떠내려갔다는 이야기인데, 겐로쿠 12년(1699년)의 '시모다정 수장'(下田町水帳)에는 이런 이름의 마을이 없었고 겐로쿠 지진보다 호에이 지진의 피해가 더 컸기 때문에 이 전설은 호에이 지진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370]

하마나호가 태평양과 연결되는 아라이 지역은 쓰나미로 3.9km나 크게 뚫려 엔슈나다와 호수를 가르는 반도가 끊어져 섬이 되었고, 반도에 있던 아라이 관문과 아라이슈쿠도 쓰나미에 쓸려가 유실되어 길이 끊어졌다. 그 결과 하마나호 북쪽으로 우회하는 혼사카도리 지역이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쓰나미 이후 슈쿠바 마을은 1708년 정월 이전 공사를 시작해 3-4월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였다. 슈쿠바가 이전되면서 아라이에서 마이사카 사이 거리가 나룻배로 5.9km가 되었다.[371][372] 시라스카 지역도 지진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무너지고 쓰나미로 유실되어 지진 이후 시라스카슈쿠도 시오미자카 고지대로 이전했으며 원래의 슈쿠바 마을은 모토마치로 이름이 바뀌었다.[373]

'오와세구미 대촌장 문서'(尾鷲組大庄屋文書)에서는 지진 1시간 정도 후 오와세에서 높이 약 1장 9척(지상 5.7m, 해상 8m-10m)의 쓰나미가 몰려와 천여 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74] 가타만(현 오와세시)에서는 바닷물의 고유진동으로 안쪽에 있던 가타 마을에서 매우 높은 파도가 몰아쳐 바닷가 주택이 모두 유실되었다고 한다.[375] 가타 마을은 1854년 안세이 도카이 지진과 1944년 쇼와 도난카이 지진에서도 가장 높은 쓰나미에 휩쓸렸던 곳이다.[348] 구마노항에서는 긴포(현 다이키정)과 오토마리(현 구마노시) 마을의 집이 모두 유실되는 등 피해가 매우 컸으며,[376] '거가일기'(居家日記)에서는 기슈 구마노항 210km, 바닷가 108개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377]

난부(현 미나베정)에서는 바다의 가시마섬 미야마산에 5-6겹의 파도가 몰아치는 중 희고 둥근 빛을 발해 크고 작은 두 파도로 나누어져 큰 것은 동쪽으로 가고 작은 것은 남쪽으로 갔으나 난부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378] 이나미 (현 이나미정)에서는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가 300명에 달해 닌조지에 있는 합동위패에 162명의 이름이 써져 있고, '산처럼 볼록하게 돌진해 온 집안에 들어와 전부 쓸려갔다'라고 당시 쓰나미가 닥쳤을 때가 기록되어 있다.[379] 히로촌(현 히로정)에서는 쓰나미로 지형 자체가 바뀌었을 정도라 가옥 850채가 유실되었으며 192명이 사망했고, 유아사(현 유아사정)에서는 쓰나미로 유실되거나 무너진 집이 563채였으며 41명이 사망했고 히로와 유아사 주변 땅은 바다로 바뀌었다.[379]

오사카에서는 지진 약 2시간 후 쓰나미가 닥쳐 구 요도가와강과 기즈가와강 하구에서 물이 시가지로 넘어왔다. 하구에 정박되어 있던 배가 상류로 떠내려가면서 다리가 파괴되었는데 도톤보리강 유역에서 다리 파괴 정도가 제일 심했으며, 가재도구를 싣고 배로 피난하려던 사람들과 다리를 건너려 했던 사람들이 많이 익사하였다.[380] 쓰나미로 오사카에서만 익사자가 7천 명이 넘었으며 지진으로 인한 총 사망자는 12,000명 정도이고 지진으로 무너진 집이 630여 채, 10,620 가구 총 15,620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단 '섭양기관'(摂陽奇観)에서는 오사카산고 중 덴마구미니에서 993채 유실, 540명 사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사카 전체 사망자는 이의 5배 정도로 보는 것이 더 맞다는 설도 있다.[381] 또한 피해 보고가 조사 시점에 따라 크게 바뀌는데 막부의 피해보고서 사본으로 추정되는 오와리번 번사 호리 사다요시가 기록한 '조림'(朝林)에서는 압사자 5,351명, 익사자 16,371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따지면 오사카의 사망자 수는 최소 21,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310]

도사국 우라토만에 접한 다네자키촌[382]에서는 23m에 달하는 쓰나미가 몰려와[383] 수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려갔다고 하며 700명이 사망했다. 이마무라 아키쓰네는 다네자키 지역이 태평양에 접한 사주 지형을 끼고 있어 쓰나미 높이가 매우 높아지는 지형이라고 하였으며,[359][383] '만변기'에서 쓰인 최대 높이는 꼭 다네자키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필자인 사와다 히로시가 전해들은 쓰나미 높이 중 도사에서 제일 높았던 쓰나미 높이를 기록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384] 당시 가네자키에 살고 있던 도사 번사인 가사와이 이시다이키가 소년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쓴 '가시와이씨 난행록'(柏井氏難行録)[385]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피난 중에 그을음 같이 검은 쓰나미에 휩쓸려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고서 간신히 도망쳐 피난한 기록이 남아 있다.[386]

지반이 침하된 고치성 아래 주변 지역은 우라토만에서 몰려온 쓰나미로 일대가 바다가 되었으며, 구마, 진센지, 아조노, 이치노미야, 누노시다, 게라, 오쓰 산간 바로 아래 지역 등이 전부 침수되었다. '곡릉기'(谷陵記)에서는 "견고한 2층집도 지진에 무너지거나 파손을 입었으며 어성도 피해를 입고 쓰나미가 마을을 덮쳐 다리를 무너뜨리고 만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 가가미가와강 등을 거슬러 올라가 고치 지역이 황폐화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43][387]

'남로지'(南路志)의 기록에서는 스사키(현 스사키시)에서 신조강 줄기 하류 향촌의 덴만구에서 위쪽 4-5정(해안선에서 약 4.5km 떨어진 거리)까지 쓰나미가 왔으며, 사쿠라가와에서는 아이노고촌의 다메사다(해안선에서 약 2.5km 떨어진 곳)까지 쓰나미가 들이닥쳤다고 한다. 스사키에서만 약 400명이 익사해 저수지에 수많은 시신들이 떠내려갔다고 하며, 내륙의 고다촌에서도 쓰나미가 올라간 높이가 18m로 추정되며 스와 신사가 떠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다.[388] 스사키 하치만궁의 신거도 떠내려갔으며 4일 후 이즈 시모다 지역에서 신거를 건져 올려 신하치만궁 신사를 지어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이즈 지역에서 풍어제를 지냈으나 스사키촌의 반환 요청으로 원래 자리로 되돌려졌다.[389][390]

구레(현 나카토사정)에서는 쓰나미가 오사카야, 야키사카, 나가사와 지역까지 밀려들어와 야키사카 산지의 25.7m 지점까지 쓰나미가 거슬러 올라갔으며,[383] 구레하치만구 건물이 통째로 유실되고 사망자가 약 200명에 달했다.[391] '곡릉기' 등 고문서에서는 도사 해안 각지의 마을들이 전멸했다는 망소(亡所) 기록이나 쓰나미가 산을 넘었다(潮は山まで)라는 기록이 곳곳에 나와 있다. 이 '전멸' 기록은 도사 서부에서 많이 나오며 가미군 데스메(현 고난시)에서 하타군 사카키(현 스쿠모시)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392][393][394]

도사번은 1707년 11월 29일(10월 26일) 영내 피해상황을 에도 막부에 보고하였고 '공의차출'(公儀差出)에서는 쓰나미 피해 가옥 11,170채, 피해 논 45,170섬, 사망자 1,844명으로 보고했으며 '정해변기'(丁亥変記)에서는 영주 야마우치 도요타카가 1년간 참근교대를 면제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마쓰다이라 노리사토(도바번), 다테 무네요시(우와지마번), 마쓰다이라 다다타카(가케가와번), 나이토 가즈노부(다나카번), 미야케 야스오(다와라번)도 마찬가지로 참근교대를 면제받았다.[395]

우와지마에서는 혼정, 우라정, 신정, 유미정, 니라사키까지 쓰나미가 밀려왔으며 요시다에서는 민가 50채가 유실되었다.

분고 우스키에서는 쓰나미가 우스키성 3번째 성곽의 사무라이 저택들까지 밀려왔다.[396] 또한 내륙 약 5km 안쪽에 있는 우스키 석불 인근의 미나미쓰루와 스에히로 카와미치 근처까지 쓰나미가 밀려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397][398][399] 분고 사이키에서는 오테마에 1.5m 높이의 쓰나미가 들이닥쳤고 쓰나미가 총 7번이나 몰아쳐 "성 안이라도 사양할 필요는 없다"며 마을 사람들을 사이키성 안으로 피난시켰다.[400] '마을 고문서'(村の古文書)에서는 요노즈(현 사이키시)에서는 요후쿠지 신사의 돌계단이 2개만 남기고 전부 물에 잠겨 쓰나미 높이가 대략 11.5m에 달하며, 이노리우라에서는 11m, 미야노우라에서는 5.7m의 쓰나미가 덮쳤다.[368]

지진의 진동과 쓰나미 외에도 지반 침하와 액상화현상까지 겹쳐 제방이 붕괴되어 세토 내해 연안의 하리마 아코쇼도섬에서는 염전이 모두 물에 잠겼으며, 도토미 우부미, 오와리 가리야, 이세 야마다, 후타미, 기이 신구, 하리마 고지마만, 이요 사이조 등 일본 각지의 신덴을 중심으로 논밭이 전부 물에 잠겼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시작되어 에도 시대 가속화된 신덴 개발 건수는 호에이 지진 이후 급감하여 간척과 개발 풍토 자체가 전환되었다.[401]

지진 및 쓰나미로 인한 피해를 총합하면 최소 사망자는 2만 명이며 논밭은 최소 30만 섬이 파괴되었고 선박 최소 3천 척이 파손된 것으로 추정된다.[284] '죽교여필'(竹橋余筆) 및 '락지당년록'(楽只堂年録)에 기록된 각 번의 막부 피해 보고서에서는 총 사망자 5천 명, 유실 주택 1만 8천 채, 붕괴 주택 5만 9천 채, 반파 및 손상 주택 만 3천 채, 창고 피해 2천 채, 파손 선박 약 3,900척, 논밭 피해 약 14만 석 및 1만 6천 정보이다. 이 수는 막부에 보고한 시점에서는 정확하나 실제 피해액은 이보다 수십 %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오사카 등지에서는 문헌마다 피해 규모가 크게 변하기 때문에 전체 피해를 산정하기가 어렵다.[228]

진도 6 이상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스루가에서 서쪽의 도카이 지방 연안부에서 오사카 평야, 나라 분지, 기이 반도, 시코쿠, 규슈 동부의 분고, 휴가까지 미치며, 게다가 가이, 시나노 등 내륙부, 이즈모 기즈키 지방 등 일본해 측에도 일부 진도 6으로 추정되는 지역이 분포했다. 에도, 교토에서도 진도 4-5로 추정되지만 피해는 비교적 경미했으며, 교토에서는 도본간지 등에서 건물이 파손되고(『마츠오 가문 누대 일기』)[76], 도지5층탑의 구륜이 낙하(『오사카 대지진 쓰나미의 일』)[77], 에도 쓰가루 번 저택은 토장 벽이 파손되었다(『어 일기』)[78]。나라의 도다이 사에서는 동남원의 담이 뒷문에서 동쪽이 전부 무너지고, 도다이 사 령분의 집이 349채 중 18채가 무너졌다(『도다이 사 연중 행사기』)[79]。진도 4 이상의 영역은 규슈에서 고신에쓰 지방에 걸쳐 무쓰 국의 하치노헤(현・아오모리현하치노헤시)에서도 유감이었다[45][80]。더욱이 『중국 지진 역사 자료 묶음』의 기록에는 저장 궤안(현・후저우시우싱구)에서 "지진, 물이 솟아오름"이라고 적혀 있다[81]

지진의 흔들림에 의한 피해는 도카이도, 이세만 연안 및 기이 반도에서 가장 현저하며, 후쿠로이슈쿠에서는 건물이 남김없이 무너졌고, 시라스카슈쿠도 무너진 후 쓰나미로 유실되었다. 유이슈쿠, 구노잔, 슨푸, 오카베슈쿠, 후쿠로이슈쿠 등은 막부에의 피해 보고에 "4일 낮 8시 무렵, 5일 아침 6시 무렵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락지당 연록』)" 등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의 후지노미야 지진과의 피해 구분이 곤란하다. 가옥 붕괴는 스루가에서 도사까지 현저하며, 피해는 이즈모, 에치젠, 시나노 등 오기 시치도에 미친다[82]

도카이도의 피해 상황은 스루가 이서에서 현저했다[83]。지진 8일 후, 막부는 눈치 2명을 파견하여 도카이도 길의 숙장 마을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또한 재해 복구에 대해서는 도카이도 길의 막부령에 있던 숙장 마을 중, 예를 들어 요시와라슈쿠에서 유이슈쿠까지의 보수 복구는 마쓰다이라가 수고를 명령받고, 막부 내각에서 지진 담당을 맡은 계산 봉행인 오기하라 시게히데가 마쓰다이라 가문 보수 봉행 본 담당자에게 보수금의 개산을 내시하여 보수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공사 등 보수 실무는 대관 하인의 지시를 받은 막부 지정의 에도의 청부 업자 담당이었지만, 촌 보수도 허용되었다. 이들 숙장 마을의 가옥 및 도로 복구금의 합계는 14,931 80닢이었다. 보수금의 부담은 모두 마쓰다이라 가문이었지만, 피해를 입은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막부에 의한 구제로 간주한 것이 실태였다(『마쓰다이라 가문 문서』)[84]

도사에서는 『공의 차출』에 무너진 집 4866채가 있고, 고치, 스사키 등 각지에서 액상화가 발생, 나카무라에서는 집이 3분의 2 무너지고, 스쿠모에서는 화재가 발생했지만, 본 지진에서는 화재는 적었다[85]

지진 후, 각 번・영주들은 성・저택・성하 마을・향의 피해를 막부에 보고했으며, 『락지당 연록』에는 성의 파손 보고가 보인다[86]

3. 4. 2. 인명 피해

이즈 시모다에서는 쓰나미로 집 925채 중 857채가 떠내려갔고 55채는 반쯤 무너졌다.[370] 하마나호가 태평양과 연결되는 아라이 지역은 쓰나미로 크게 뚫려 섬이 되었고, 아라이 관문과 아라이슈쿠도 쓰나미에 쓸려가 유실되었다.[371][372] 시라스카 지역도 지진으로 전부 무너지고 쓰나미로 유실되어 시오미자카 고지대로 이전했다.[373]

'오와세구미 대촌장 문서'에는 오와세에서 높이 약 5.7m(해상 8-10m)의 쓰나미로 천여 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74] 가타만(현 오와세시)에서는 바닷물의 고유진동으로 매우 높은 파도가 몰아쳐 주택이 유실되었다.[375] 구마노항에서는 긴포(현 다이키정)과 오토마리(현 구마노시) 마을의 집이 모두 유실되는 등 피해가 컸다.[376]

난부(현 미나베정)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다.[378] 이나미에서는 쓰나미로 300명이 사망했다.[379] 히로촌(현 히로정)에서는 쓰나미로 지형이 바뀌어 가옥 850채가 유실되고 192명이 사망했으며, 유아사에서는 쓰나미로 563채가 유실되거나 무너지고 41명이 사망했다.[379]

오사카에서는 지진 약 2시간 후 쓰나미가 닥쳐 구 요도가와강과 기즈가와강 하구에서 물이 시가지로 넘어왔다. 도톤보리강 유역에서 다리 파괴가 심했으며, 많은 사람이 익사하였다.[380] 쓰나미로 오사카에서만 익사자가 7천 명이 넘었고, 지진으로 인한 총 사망자는 12,000명 정도였다.[381] 오사카의 사망자수는 최소 21,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310]

도사국 우라토만에 접한 다네자키촌에서는 약 23m에 달하는 쓰나미가 몰려와 700명이 사망했다. 이마무라 아키쓰네는 다네자키 지역이 사주 지형이라 쓰나미 높이가 높아졌다고 했다.[359][383]

지반이 침하된 고치성 아래 주변 지역은 쓰나미로 일대가 바다가 되었다.[243][387]

'남로지' 기록에는 스사키에서 신조강 줄기 하류 향촌의 덴만구에서 약 4.5km 떨어진 곳까지 쓰나미가 왔다고 한다. 스사키에서만 약 400명이 익사했다.[388]

구레(현 나카토사정)에서는 쓰나미가 구레하치만구 건물을 유실시키고 약 200명이 사망했다.[391]

도사번에도 막부에 피해 상황을 보고했는데, 쓰나미 피해 가옥 11,170채, 사망자 1,844명으로 보고했다.[395]

우와지마에서는 쓰나미가 밀려왔고, 요시다에서는 민가 50채가 유실되었다.

분고 우스키에서는 쓰나미가 우스키성 3번째 성곽의 사무라이 저택들까지 밀려왔다.[396] 분고 사이키에서는 약 1.5m 높이의 쓰나미가 덮쳤다.[400]

지진 및 쓰나미로 인한 피해를 총합하면 최소 사망자는 2만 명으로 추정된다.[284] 지진으로 4,900명에서 21,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2]

3. 4. 3. 건물 피해

이즈 시모다에서는 집 925채 중 857채가 쓰나미로 떠내려갔고 55채는 지진으로 반쯤 무너졌다. 시모다는 겐로쿠 대지진 당시에도 쓰나미 피해를 입었으나 이때는 492채가 유실되었다. 시모다시에 전해져 내려오는 '시치겐초'(七軒町) 전설에 따르면, 옛 지진 당시 마을 전체에서 집이 7채만 남고 전부 떠내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겐로쿠 12년(1699년)의 '시모다정 수장'(下田町水帳)에는 이런 이름의 마을이 없었고, 겐로쿠 지진보다 호에이 지진의 피해가 더 컸기 때문에 이 전설은 호에이 지진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370]

하마나호가 태평양과 연결되는 아라이 지역은 쓰나미로 3.9km나 크게 뚫려 엔슈나다와 호수를 가르는 반도가 끊어져 섬이 되었고, 반도에 있던 아라이 관문과 아라이슈쿠도 쓰나미에 쓸려가 유실되어 길이 끊어졌다. 이로 인해 하마나호 북쪽으로 우회하는 혼사카도리 지역이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쓰나미 이후 슈쿠바 마을은 1708년 정월 이전 공사를 시작해 3-4월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였다. 슈쿠바가 이전되면서 아라이에서 마이사카 사이 거리가 나룻배로 5.9km가 되었다.[371][372] 시라스카 지역도 지진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무너지고 쓰나미로 유실되어 지진 이후 시라스카슈쿠도 시오미자카 고지대로 이전했으며 원래의 슈쿠바 마을은 모토마치로 이름이 바뀌었다.[373]

'오와세구미 대촌장 문서'(尾鷲組大庄屋文書)에서는 지진 1시간 정도 후 오와세에서 높이 대략 1장 9척(지상 5.7m, 해상에서 8m-10m)의 쓰나미가 몰려와 천여 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74] 가타만(현 오와세시)에서는 바닷물의 고유진동으로 안쪽에 있던 가타 마을에서 매우 높은 파도가 몰아쳐 바닷가 주택이 모두 유실되었다고 한다.[375] 가타 마을은 1854년 안세이 도카이 지진과 1944년 쇼와 도난카이 지진에서도 가장 높은 쓰나미에 휩쓸렸던 곳이다.[348] 구마노항에서는 긴포(현 다이키정)과 오토마리(현 구마노시) 마을의 집이 모두 유실되는 등 피해가 매우 컸으며,[376] '거가일기'(居家日記)에서는 기슈 구마노항 210km, 바닷가 108개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377]

난부(현 미나베정)에서는 바다의 가시마섬 미야마산에 5-6겹의 파도가 몰아치는 중 희고 둥근 빛을 발해 크고 작은 두 파도로 나누어져 큰 것은 동쪽으로 가고 작은 것은 남쪽으로 갔으나 난부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378] 이나미 (현 이나미정)에서는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가 300명에 달해 닌조지에 있는 합동위패에 162명의 이름이 써져 있고, '산처럼 볼록하게 돌진해 온 집안에 들어와 전부 쓸려갔다'라고 당시 쓰나미가 닥쳤을 때가 기록되어 있다.[379] 히로촌(현 히로정)에서는 쓰나미로 지형 자체가 바뀌었을 정도라 가옥 850채가 유실되었으며 192명이 사망했고, 유아사(현 유아사정)에서는 쓰나미로 유실되거나 무너진 집이 563채였으며 41명이 사망했고 히로와 유아사 주변 땅은 바다로 바뀌었다.[379]

오사카에서는 지진 약 2시간 후 쓰나미가 닥쳐 구 요도가와강과 기즈가와강 하구에서 물이 시가지로 넘어왔다. 하구에 정박되어 있던 배가 상류로 떠내려가면서 다리가 파괴되었는데 도톤보리강 유역에서 다리 파괴 정도가 제일 심했으며 가재도구를 싣고 배로 피난하려 했던 사람들과 다리를 건너려 했던 사람들이 많이 익사하였다.[380] 쓰나미로 오사카에서만 익사자가 7천 명이 넘었으며 지진으로 인한 총 사망자는 12,000명 정도이고 지진으로 무너진 집이 630여 채, 10,620 가구 총 15,620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단 '섭양기관'(摂陽奇観)에서는 오사카산고 중 덴마구미에서 993채 유실, 540명 사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사카 전체 사망자는 이의 5배 정도로 보는 것이 더 맞다는 설도 있다.[381] 또한 피해 보고가 조사 시점에 따라 크게 바뀌는데 막부의 피해보고서 사본으로 추정되는 오와리번 번사 호리 사다요시가 기록한 '조림'(朝林)에서는 압사자 5,351명, 익사자 16,371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따지면 오사카의 사망자수는 최소 21,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310]

구레 쿠마노 신사 진재비 나카토사정 쿠레


도사국 우라토만에 접한 다네자키촌[382]에서는 23m에 달하는 쓰나미가 몰려와[383] 수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려갔다고 하며 700명이 사망했다. 이마무라 아키쓰네는 다네자키 지역이 태평양에 접한 사주 지형을 끼고 있어 쓰나미 높이가 매우 높아지는 지형이라고 하였으며,[359][383] '만변기'에서 써진 최대 높이는 꼭 다네자키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필자인 사와다 히로시가 전해들은 쓰나미 높이 중 도사에서 제일 높았던 쓰나미 높이를 기록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384] 당시 가네자키에 살고 있던 도사 번사인 가사와이 이시다이키가 소년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쓴 '가시와이씨 난행록'(柏井氏難行録)[385]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피난 중에 그을음 같이 검은 쓰나미에 휩쓸려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고서 간신히 도망쳐 피난한 기록이 남아 있다.[386]

지반이 침하된 고치성 아래 주변 지역은 우라토만에서 몰려온 쓰나미로 일대가 바다가 되었으며, 구마, 진센지, 아조노, 이치노미야, 누노시다, 게라, 오쓰 산간 바로 아래 지역 등이 전부 침수되었다. '곡릉기'(谷陵記)에서는 "견고한 2층집도 지진에 무너지거나 파손을 입었으며 어성도 피해를 입고 쓰나미가 마을을 덮쳐 다리를 무너뜨리고 만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 가가미가와강 등을 거슬러 올라가 고치 지역이 황폐화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43][387]

'남로지'(南路志)의 기록에서는 스사키(현 스사키시)에서 신조강 줄기 하류 향촌의 덴만구에서 위쪽 4-5정(해안선에서 약 4.5km 떨어진 거리)까지 왔으며, 사쿠라가와에서는 아이노고촌의 다메사다(해안선에서 약 2.5km 떨어진 곳)까지 쓰나미가 들이닥쳤다고 한다. 스사키에서만 약 400명이 익사해 저수지에 수많은 시신들이 떠내려갔다고 하며, 내륙의 고다촌에서도 쓰나미가 올라간 높이가 18m로 추정되며 스와 신사가 떠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다.[388] 스사키 하치만궁의 신거도 떠내려갔으며 4일 후 이즈 시모다 지역에서 신거를 건져올려 신하치만궁 신사를 지어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이즈 지역에서 풍어제를 지냈으나 스사키촌의 반환 요청으로 원래 자리로 되돌려졌다.[389][390]

구레(현 나카토사정)에서는 쓰나미가 오사카야, 야키사카, 나가사와 지역까지 밀려들어와 야키사카 산지의 25.7m 지점까지 쓰나미가 거슬러 올라갔으며,[383] 구레하치만구 건물이 통째로 유실되고 사망자가 약 200명에 달했다.[391] '곡릉기' 등 고문서에서는 도사 해안 각지의 마을들이 전멸했다는 망소(亡所) 기록이나 쓰나미가 산을 넘었다(潮は山まで)라는 기록이 곳곳에 나와 있다. 이 '전멸' 기록은 도사 서부에서 많이 나오며 가미군 데스메(현 고난시)에서 하타군 사카키(현 스쿠모시)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392][393][394]

도사번은 10월 26일(양력 1707년 11월 29일) 영내 피해상황을 에도 막부에 보고하였고 '공의차출'(公儀差出)에서는 쓰나미 피해 가옥 11,170채, 피해 논 45,170섬, 사망자 1,844명으로 보고했으며 '정해변기'(丁亥変記)에서는 영주 야마우치 도요타카가 1년간 참근교대를 면제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마쓰다이라 노리사토(도바번), 다테 무네요시(우와지마번), 마쓰다이라 다다타카(가케가와번), 나이토 가즈노부(다나카번), 미야케 야스오(다와라번)도 마찬가지로 참근교대를 면제받았다.[395]

우와지마에서는 혼정, 우라정, 신정, 유미정, 니라사키까지 쓰나미가 밀려왔으며 요시다에서는 민가 50채가 유실되었다.

분고 우스키에서는 쓰나미가 우스키성 3번째 성곽의 사무라이 저택들까지 밀려왔다.[396] 또한 내륙 약 5km 안쪽에 있는 우스키 석불 인근의 미나미쓰루와 스에히로 카와미치 근처까지 쓰나미가 밀려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397][398][399] 분고 사이키에서는 오테마에 5척(약 1.5m) 높이의 쓰나미가 들이닥쳤고 쓰나미가 총 7번이나 몰아쳐 "성 안이라도 사양할 필요는 없다"며 마을 사람들을 사이키성 안으로 피난시켰다.[400] '마을 고문서'(村の古文書)에서는 요노즈(현 사이키시)에서는 요후쿠지 신사의 돌계단이 2개만 남기고 전부 물에 잠겨 쓰나미 높이가 대략 11.5m에 달하며, 이노리우라에서는 11m, 미야노우라에서는 5.7m의 쓰나미가 덮쳤다.[368]

지진의 진동과 쓰나미 외에도 지반 침하와 액상화현상까지 겹쳐 제방이 붕괴되어 세토 내해 연안의 하리마 아코쇼도섬에서는 염전이 모두 물에 잠겼으며, 도토미 우부미, 오와리 가리야, 이세 야마다, 후타미, 기이 신구, 하리마 고지마만, 이요 사이조 등 일본 각지의 신덴을 중심으로 논밭이 전부 물에 잠겼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시작되어 에도 시대 가속화된 신덴 개발 건수는 호에이 지진 이후 급감하여 간척과 개발 풍토 자체가 전환되었다.[401]

지진 및 쓰나미로 인한 피해를 총합하면 최소 사망자는 2만 명이며 논밭은 최소 30만 섬이 파괴되었고 선박 최소 3천 척이 파손된 것으로 추정된다.[284] '죽교여필'(竹橋余筆) 및 '락지당년록'(楽只堂年録)에 기록된 각 번의 막부 피해 보고서에서는 총 사망자 5천 명, 유실 주택 1만 8천 채, 붕괴 주택 5만 9천 채, 반파 및 손상 주택 만 3천 채, 창고 피해 2천 채, 파손 선박 약 3,900척, 논밭 피해 약 14만 석 및 1만 6천 정보이다. 이 수는 막부에 보고한 시점에서는 정확하나 실제 피해액은 이보다 수십 %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오사카 등지에서는 문헌마다 피해 규모가 크게 변하기 때문에 전체 피해를 산정하기가 어렵다.[228]

지진으로 4,900명에서 21,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29,000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최소 1건의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는 시즈오카현의 오야 산사태였다.[12] 일본 3대 산사태 중 하나인 이 산사태는 1.8km2 면적을 추정 1억 2천만 m3의 토석류로 덮었다.[13] 나라현 분지에서는 지진으로 인한 토사 액상화의 증거가 나타났다.[14]

진도 6 이상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스루가에서 서쪽의 도카이 지방 연안부에서 오사카 평야, 나라 분지, 기이 반도, 시코쿠, 규슈 동부의 분고, 휴가까지 미치며, 게다가 가이, 시나노 등 내륙부, 이즈모 기즈키 지방 등 일본해 측에도 일부 진도 6으로 추정되는 지역이 분포했다. 에도, 교토에서도 진도 4-5로 추정되지만 피해는 비교적 경미했으며, 교토에서는 도본간지 등에서 건물이 파손되고(『마츠오 가문 누대 일기』)[76], 도지5층탑의 구륜이 낙하(『오사카 대지진 쓰나미의 일』)[77], 에도 쓰가루 번 저택은 토장 벽이 파손되었다(『어 일기』)[78]。나라의 도다이 사에서는 동남원의 담이 뒷문에서 동쪽이 전부 무너지고, 도다이 사 령분의 집이 349채 중 18채가 무너졌다(『도다이 사 연중 행사기』)[79]。진도 4 이상의 영역은 규슈에서 고신에쓰 지방에 걸쳐 무쓰 국의 하치노헤(현・아오모리현하치노헤시)에서도 유감이었다[45][80]。더욱이 『중국 지진 역사 자료 묶음』의 기록에는 저장 궤안(현・후저우시우싱구)에서 "지진, 물이 솟아오름"이라고 적혀 있다[81]

지진의 흔들림에 의한 피해는 도카이도, 이세만 연안 및 기이 반도에서 가장 현저하며, 후쿠로이슈쿠에서는 건물이 남김없이 무너졌고, 시라스카슈쿠도 무너진 후 쓰나미로 유실되었다. 유이슈쿠, 구노잔, 슨푸, 오카베슈쿠, 후쿠로이슈쿠 등은 막부에의 피해 보고에 "4일 낮 8시 무렵, 5일 아침 6시 무렵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락지당 연록』)" 등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의 후지노미야 지진과의 피해 구분이 곤란하다. 가옥 붕괴는 스루가에서 도사까지 현저하며, 피해는 이즈모, 에치젠, 시나노 등 오기 시치도에 미친다[82]

도카이도의 피해 상황은 스루가 이서에서 현저했다[83]。지진 8일 후, 막부는 눈치 2명을 파견하여 도카이도 길의 숙장 마을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또한 재해 복구에 대해서는 도카이도 길의 막부령에 있던 숙장 마을 중, 예를 들어 요시와라슈쿠에서 유이슈쿠까지의 보수 복구는 마쓰다이라가 수고를 명령받고, 막부 내각에서 지진 담당을 맡은 계산 봉행인 오기하라 시게히데가 마쓰다이라 가문 보수 봉행 본 담당자에게 보수금의 개산을 내시하여 보수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공사 등 보수 실무는 대관 하인의 지시를 받은 막부 지정의 에도의 청부 업자 담당이었지만, 촌 보수도 허용되었다. 이들 숙장 마을의 가옥 및 도로 복구금의 합계는 14,931 80닢이었다. 보수금의 부담은 모두 마쓰다이라 가문이었지만, 피해를 입은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막부에 의한 구제로 간주한 것이 실태였다(『마쓰다이라 가문 문서』)[84]

도사에서는 『공의 차출』에 무너진 집 4866채가 있고, 고치, 스사키 등 각지에서 액상화가 발생, 나카무라에서는 집이 3분의 2 무너지고, 스쿠모에서는 화재가 발생했지만, 본 지진에서는 화재는 적었다[85]

지진 후, 각 번・영주들은 성・저택・성하 마을・향의 피해를 막부에 보고했으며, 『락지당 연록』에는 성의 파손 보고가 보인다[86]

성곽의 피해 상황
가도석축의 팽창・붕괴망루・담・문 등의 파손
기나이다카토리 성, 기시와다 성고리야마 성, 요도 성, 다카쓰키 성, 아마가사키 성
도카이도다나카 성, 요코스카 성, 오카자키 성, 요시다 성, 다하라 성, 안노쓰 성, 도바 성, 가메야마 성, 고후 성고후 성, 슨푸 성, 하마마쓰 성, 가리야 성, 나고야 성, 이누야마 성, 나가시마 성
도산도다카토 성, 이다 성, 이와무라 성, 구와나 성, 오가키 성, 히코네 성마쓰시로 성, 마쓰모토 성, 다카시마 성, 가노 성, 제제 성
호쿠리쿠도오바마 성
산요도아카시 성, 아코 성후쿠야마 성
난카이도다카마쓰 성, 마루가메 성, 이마바리 성, 오즈 성, 우와지마 성와카야마 성, 고치 성
사이카이도후나이 성, 우스키 성, 사에키 성, 오카 성, 노베오카 성기쓰키 성, 히토요시 성



기이 신구 성 천수는 동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하토리 도쿠타로 씨 수집 문서』)[87]。지진 후, 각 번은 성 등의 보수의 허가를 막부에 신청하고 있으며, 예를 들어 시나노 스와 번은 11월 9일(1707년 12월 2일), 이요 오즈 번은 11월 26일(1707년 12월 19일)에, 각각 석축의 수리를 신청한 대로 허가받고 있다(『구상 각서』[88]『오즈 신타니 번정 연년사』)[89])。

오와리 번의 봉행, 아사히 문좌위문 시게아키의 일기 『앵무 옹중기』에 따르면, 서원에서 저녁 식사의 술이 한 바퀴 돌 무렵, 동북에서 울려 퍼지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츰 강해져 진정되지 않아 뜰로 뛰어내리자, 흔들림이 배가 되어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고 한다. 더욱이 나고야성 삼의 마루에 화재가 일어나 성하에서는 무가 저택의 담의 7-8할이 무너지고, 지면이 갈라지고 진흙이 솟아오른 모습이 적혀 있다[90][91]

오사카 성은 망루나 문 등이 파손되는 정도였지만, 오사카 성하에서는 니시요코보리・에도보리・후시미보리・다치우리보리・미나미호리에・기타노 신치・신사이바시 거리는 건물이 남김없이 무너졌다(『오사카 지진의 控』)[92]。히로시마에서는 술집, 간장집 등에서 술통 중 절반을 잃고, 히로시마 성의 해자 물이 넘쳐 길을 적시고, 석벽도 붕괴되었다(『히로시마시사』)[93]

본 지진에서는 각지에서 산체 붕괴, 산사태가 현저했다[94]。아베 강 상류에서는 1억 2000만 m3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오야쿠즈레가 발생하고[95], 후지 강도 시라토리 산의 산사태로 인해 제지호를 형성하여 3일 후에 붕괴되었다[25]。사누키에서는 고켄잔의 한쪽이 큰 소리와 함께 붕괴되었다고 한다(『수관록』)[90][96]。무로토곶 부근에서는 사키하마 강 상류에서 가나기 붕괴가 발생했다[97]。오치(현・오치정)에서는 마이가하나가 붕괴되어 니요도 강을 막아 4일간 담수되어 "해발 61m 이하의 장소에 집을 짓지 말라"는 경고 석비가 몇 군데 있다[98][99]

도카이도의 피해 상황
숙장 마을(추정 진도)[45][100]피해의 기록(『곡릉기』)
에도(4-5) - 시나가와(4-5) - 가와사키(4-5) - 가나가와 - 호도가야 - 도츠카(4-5) - 후지사와(4-5) - 히라쓰카 - 오이소(4-5) - 오다와라(5) - 하코네(5) - 미시마(5) - 누마즈 - 하라(7)소지진
요시와라(7)집 무너짐, 사망자 없음
간바라(5-6) - 유이(6)파손, 세이켄지 연고 약국, 남김없이 무너짐
오코쓰(6) - 에지리(7) - (후추)(6) - (마루코)(5-6) - 오카베(6) - 후지에다(6) - 시마다(6) - 가나야(6) - 니치사카(6-7)집 크게 무너짐
가케가와(6-7)집 크게 무너짐
후쿠로이(7)남김없이 무너짐
미쓰케(6) - 하마마쓰(6-7) - 마이사카(6-7)반 무너짐
아라이(6-7) - (시라스카)(7)쓰나미로, 어번소 유실
후타가와(5-6)반 무너짐
요시다(7)요시다 성 무너짐, 마을 가옥도 크게 파손
고유(5) - 아카사카(5) - 후지카와(5)아무 일 없음
오카자키(5-6)소파, 다리 떨어짐
지류(5-6)아무 일 없음
나루미(6) - 미야반 무너짐, 오가키 성 파손
구와나(6)아무 일 없음
요카이치(6-7)요카이치까지 다리 없음, 반 무너짐
이시야쿠시 - 쇼노 - 가메야마(5-6) - 세키 - 사카시타 - 쓰치야마(4-5) - 미나쿠치(4-5) - 이시베(4-5) - 구사쓰 - 오쓰(5-6)소파
교토(4-5)정원 안 물 배가 넘침, 10분 중 5분 정도 『기히 공기』



{| class="wikitable"

! style="background-color:#669999" | 가도 !! style="background-color:#aad" | 추정 진도[25][45]

|-

| style="white-space:nowrap"| 기나이 || 교토(4-5), 요도(6), 다카쓰키(5-6), 오사카(6), 사카이(6), 노토(6), 사야마(6), 이즈미오쓰(6), 기시와다(6), 후세(7), 큐호지(7), 유게(7), 가시와라(7), 요다(6-7), 고이치(6), 히로세(6), 쓰보이(6-7), 도톤보리(6-7), 야나기모토(6), 나라(6), 고리야마(6), 단바시(6-7), 야나기모토(6), 이마이(6-7), 카이중(6), 소네(6), 요시노(5), 데라가이치(6), 아마가사키(6),

3. 4. 4. 지각 변동

지진으로 생긴 지각변동은 남동쪽이 융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무로토곶 부근은 약 2.1-2.4m, 구시모토 지역은 약 1.6m,[303] 오마에곶 지역은 1-2m 융기했다.[304] 오스가의 요코스카(현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에 있던 '후토와코로'(姥が懐) 항구는 완전히 육지가 되었다.[305][306][307][308] 1759년(호레키 9년)의 기록에는 무로토곶의 조수가 호에이 지진 전보다 약 1.5m 낮아졌다고 한다.[309]

하마나호 지역은 침강했는데, 호수 북부 기가(気賀)는 약 60cm 침강하여 논의 상당수가 물에 잠겼다. 1756년(호레키 6년)의 기록에는 마을의 80%가 황무지라고 기록되어 있다.[310] 노비평야는 15-20cm, 아쓰미반도 다하라는 15-18cm, 기이 히로는 약 1.5m, 고치 동부는 최대 약 2m 침강하여 20km2 지역이 물에 잠겼다.[229] 일부 지역은 배로 이동해야 했다.[228] 우사(현 도사시), 스자키, 구레(현 나카토사정), 이부리(현 도사시미즈시) 등 도사만 서부 지역은 2-2.5m 정도 크게 침강했다.[311][312][313]

유라시아판충상단층 형태로 섭입하며 쌓였던 왜곡이 풀리면서, 이세, 오사카, 도사, 와카마쓰 등에서 우물물이 마르는 일이 일어났다. 도고 온천은 145일 동안 물이 나오지 않았고, 기이국의 유노미네, 산치, 류진, 난키시라하마 온천 등 각지의 온천도 물이 나오지 않는 현상이 발생했다.[284]

이러한 지각변동은 난카이 해곡에서 일어나는 메가스러스트 지진의 특징을 보인다.[264]

아시즈리곶은 쇼와 난카이 지진이나 안세이 난카이 지진 때는 융기했지만, 호에이 지진 때는 침강했거나 융기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314][315][316] 스루가만 서쪽 연안의 시미즈, 미호 등은 호에이 지진 때 침강했고, 하이바라군 지역은 지각변동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17]

3. 5. 전진 및 여진

1686년 10월 3일 오전 8-9시 사이(조쿄 3년 8월 16일 진각) 규모 M6.5-7에 달하는 도토미 미카와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은 1707년 호에이 지진 이전에 일어난 내륙 직하형지진이지만 광의적 의미에서의 전진으로 분석된다.[116][117] 또한 호에이 지진 4년 전인 1703년 12월 31일(겐로쿠 16년 11월 23일)에는 간토 지방에 규모 M8.1-8.2 급의 겐로쿠 지진이 일어났고 후지산이 분화하였다.

'앵무룡중기'에서는 지진 전날인 10월 3일 나고야에서 지진광으로 보이는 발광현상 기록이 있었으며, 9월 25, 26, 28일에는 전진으로 추정되는 지진 기록이 남아있다.[42] '미야지일기'(宮地日記)에서는 9월 3일과 13일에 고치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118]

본진 약 16시간 후인 다음날 아침 묘각(오전 6시경)에는 후지산혼구센겐 대사(후지노미야) 인근에서 규모 M7.0의 호에이 후지노미야 지진이 일어나 에도, 도야마, 나고야 등지에서 강한 흔들림을 느꼈으며 무라야마센겐 신사 내부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무너지고 후지노미야와 도카이도 연안을 중심으로 사찰과 가옥이 무너지는 등 인명 피해가 컸다.[18]

지진 49일 후인 11월 23일(양력 12월 16일)에는 후지산 측면이 폭발하는 호에이 대분화가 일어나면서 에도에 수에서 십여 cm의 화산재가 쌓였다. 이 분화로 후지산에 측화산인 호에이산이 생겼다.

호에이 분화구와 호에이 산


또한 다음 해인 호에이 5년 음력 1월 22일 사각에서 오각 사이(양력 1708년 2월 13일 오전 10-12시 경) 호에이 지진의 최대 여진으로 추정되는 지진이 기이반도 해역에서 일어나 교토, 나고야에서 강한 진동을 느꼈고 쓰나미가 일어나 기이반도의 시오다가 물에 잠겼으며 이세에서는 야마다후이아게정, 잇폰가에가 물에 잠기고 미야강의 제방이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다.[18]

도사국에서 기록된 두드러진 강한 여진들은 다음과 같다.[123][124]

날짜시간내용
호에이 4년 11월 16일(1707년 12월 9일)유중각(18시)대지진에 이어 강진을 느낌
호에이 4년 11월 26일(1707년 12월 19일)아침 사상각(10시)큰 지진이 있었으나 16일의 지진에 비해서는 약했음. 나고야와 교토에서도 흔들림을 느낌
호에이 4년 12월 11일(1708년 1월 3일)한밤중지진이 있었음
호에이 5년 윤달 1월 1일(1708년 2월 22일)지진이 있었음
호에이 5년 윤달 1월 2일(1708년 2월 23일)진상각(8시)지진이 있었음. 해각진(호에이 본진) 이후 가장 큰 지진이었음. 나고야에서도 땅이 크게 울림
호에이 5년 윤달 1월 27일(1708년 3월 19일)진각지진이 있었음. 오사카에서는 음력 10월 4일 이후 가장 큰 지진이었으며 나고야, 이세, 돗토리 등 넓은 지역에서 진동을 느낌
호에이 5년 2월 25일(1708년 4월 15일)밤 인각(4시)지진이 있었음. 나고야, 교토, 오사카에서도 지진을 느낌
호에이 5년 8월 18일(1708년 10월 1일)강한 지진을 느낌
호에이 5년 12월 1일(1709년 1월 11일)지진이 일어나 동남쪽에서 땅이 크게 울리는 소리가 났음. 나고야에서도 땅이 흔들림
호에이 6년 3월 11일(1709년 4월 20일)묘각(6시)지진이 있었음
호에이 6년 4월 22일(1709년 5월 31일)유하각, 해각(22시)지진이 있었음. 앞의 지진보다 더 컸음



본진으로부터 반년 정도 지난 호에이 5년 3월경에는 매일 1-2차례에서 5-6차례 정도 여진이 이어졌으며, 하네(현 무로토시 지역)에서는 호에이 5년 8-9월 경(1708년 10월 이후)에도 적은 날에는 하루 1-2회, 많은 날에는 6-7회의 여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진 3-4년 후에도 여진이 있어 '삼재록'(三災録)에서는 진미 양년(쇼토쿠 2-3년, 1712-1713년)에도 때때로 약한 지진이 있어 땅이 멈추는 일이 없었고, 오년(쇼토쿠 4년, 1714년)도 이와 같았으며 미년(쇼토쿠 5년, 1715년)에야 이르러 지진이 잦아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여진이 8년여나 계속되었고, 교호 원년(1716년)이 되어서야 여진이 잦아들었다.[123]

본진의 영향을 받아, 진원 및 여진이 발생한 지역에서 떨어진 곳에서도 규모가 큰 유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122] 대표적인 유발지진은 다음과 같다.


  • 호에이 지진 본진 24일 후인 호에이 4년 10월 28일 묘각(1707년 11월 21일 6시경), 나가토국사바군 가미토쿠지촌(현재의 야마구치시 도쿠지)에서 국지적인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가옥 289채가 붕괴되고 3명이 사망했다(『모리 11대사』).
  • 호에이 지진 본진 7년 후인 쇼토쿠 4년 3월 15일 술해각(1714년 4월 28일 21시경), 시나노 오타니 지진이 발생했다. 시나노국아즈미군 오타니촌 부근(현재의 나가노현기타아즈미군오타니촌하쿠바촌 지역)에서 규모 6 1/4 정도의 지진이었다.

3. 5. 1. 전진

1686년 10월 3일 오전 8-9시 사이(조쿄 3년 8월 16일 진각) 규모 M6.5-7에 달하는 도토미 미카와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은 1707년 호에이 지진 이전에 일어난 내륙 직하형지진이지만 광의적 의미에서의 전진으로 분석된다.[318][319] 또한 호에이 지진 4년 전인 1703년 12월 31일(겐로쿠 16년 11월 23일)에는 간토 지방에 규모 M8.1-8.2 급의 겐로쿠 지진이 일어났고 후지산이 분화하였다. '앵무룡중기'에서는 지진 전날인 10월 3일 나고야에서 발광현상을 보이는 기록이 있었으며 또한 9월 25, 26, 28일에는 전진으로 보이는 지진 기록이 남아있다.[245] '미야지일기'(宮地日記)에서는 9월 3일과 13일에 고치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320]

3. 5. 2. 여진

본진 약 16시간 후인 다음날 아침 묘각(오전 6시경)에는 후지산혼구센겐 대사(후지노미야) 인근에서 규모 M7.0의 호에이 후지노미야 지진이 일어나 에도, 도야마, 나고야 등지에서 강한 흔들림을 느꼈으며 무라야마센겐 신사 내부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무너지고 후지노미야와 도카이도 연안을 중심으로 사찰과 가옥이 무너지는 등 인명 피해가 컸다.[324][321][322][323]

지진 49일 후인 11월 23일(양력 12월 16일)에는 후지산 측면이 폭발하는 호에이 대분화가 일어나면서 에도에 수에서 십여 cm의 화산재가 쌓였다. 이 분화로 후지산에 측화산인 호에이산이 생겼다.

또한 다음 해인 호에이 5년 음력 1월 22일 사각에서 오각 사이(양력 1708년 2월 13일 오전 10-12시 경) 호에이 지진의 최대 여진으로 추정되는 지진이 기이반도 해역에서 일어나 교토, 나고야에서 강한 진동을 느꼈고 쓰나미가 일어나 기이반도의 시오다가 물에 잠겼으며 이세에서는 야마다후이아게정, 잇폰가에가 물에 잠기고 미야강의 제방이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다.[321][324]

도사국에서 기록된 두드러진 강한 여진들은 다음과 같다.[325][326]

날짜시간내용
호에이 4년 11월 16일(1707년 12월 9일)유중각(18시)대지진에 이어 강진을 느낌
호에이 4년 11월 26일(1707년 12월 19일)아침 사상각(10시)큰 지진이 있었으나 16일의 지진에 비해서는 약했음. 나고야와 교토에서도 흔들림을 느낌
호에이 4년 12월 11일(1708년 1월 3일)한밤중지진이 있었음
호에이 5년 윤달 1월 1일(1708년 2월 22일)지진이 있었음
호에이 5년 윤달 1월 2일(1708년 2월 23일)진상각(8시)지진이 있었음. 해각진(호에이 본진) 이후 가장 큰 지진이었음. 나고야에서도 땅이 크게 울림
호에이 5년 윤달 1월 27일(1708년 3월 19일)진각지진이 있었음. 오사카에서는 음력 10월 4일 이후 가장 큰 지진이었으며 나고야, 이세, 돗토리 등 넓은 지역에서 진동을 느낌
호에이 5년 2월 25일(1708년 4월 15일)밤 인각(4시)지진이 있었음. 나고야, 교토, 오사카에서도 지진을 느낌
호에이 5년 8월 18일(1708년 10월 1일)강한 지진을 느낌
호에이 5년 12월 1일(1709년 1월 11일)지진이 일어나 동남쪽에서 땅이 크게 울리는 소리가 났음. 나고야에서도 땅이 흔들림
호에이 6년 3월 11일(1709년 4월 20일)묘각(6시)지진이 있었음
호에이 6년 4월 22일(1709년 5월 31일)유하각, 해각(22시)지진이 있었음. 앞의 지진보다 더 컸음



본진으로부터 반년 정도 지난 호에이 5년 3월경에는 매일 1-2차례에서 5-6차례 정도 여진이 이어졌으며, 하네(현 무로토시 지역)에서는 호에이 5년 8-9월 경(1708년 10월 이후)에도 적은 날에는 하루 1-2회, 많은 날에는 6-7회의 여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진 3-4년 후에도 여진이 있어 '삼재록'(三災録)에서는 진미 양년(쇼토쿠 2-3년, 1712-1713년)에도 때때로 약한 지진이 있어 땅이 멈추는 일이 없었고, 오년(쇼토쿠 4년, 1714년)도 이와 같았으며 미년(쇼토쿠 5년, 1715년)에야 이르러 지진이 잦아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여진이 8년여나 계속되었고, 교호 원년(1716년)이 되어서야 여진이 잦아들었다.[325]

3. 5. 3. 유발지진

본진의 영향을 받아, 진원 및 여진이 발생한 지역에서 떨어진 곳에서도 규모가 큰 유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122]

  • 호에이 지진 본진 24일 후인 호에이 4년 10월 28일 卯の刻|묘노코쿠일본어(1707년 11월 21일 6시경), 나가토국사바군 가미토쿠지촌(현재의 야마구치시 도쿠지)에서 국지적인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가옥 289채가 붕괴되고 3명이 사망했다(『모리 11대사』).
  • 호에이 지진 본진 7년 후인 쇼토쿠 4년 3월 15일 戌亥の刻|술해노코쿠일본어(1714년 4월 28일 21시경), 시나노 오타니 지진이 발생했다. 시나노국아즈미군 오타니촌 부근(현재의 나가노현기타아즈미군오타니촌하쿠바촌 지역)에서 규모 6 1/4 정도의 지진이었다.

4. 쓰나미

1707년 호에이 지진은 1854년 도카이 지진 및 1854년 난카이 지진보다 규모가 컸다.[15] 고치현 무로토곶에서는 1707년에 2.3m 융기한 반면, 1854년에는 1.5m 융기했다.[15] 가와치 평원에는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6~7에 해당하는 진도 구역이 존재했으며, 나가사키와 한국 제주도 등 먼 지역에서도 쓰나미가 기록되었다.[15]

관측된 쓰나미 모델링과 쓰나미 퇴적물 위치를 통해 파열 길이를 추정하였다.[16][17] 처음에는 4개 구역이 파열된 것을 바탕으로 605km로 추정했지만, 해구 서쪽 끝에서 발견된 쓰나미 퇴적물을 설명할 수 없었다.[16] 이후 휴가나다 구역의 일부인 남서쪽 끝 부분의 추가 지역을 포함하여 총 파열 길이를 675~700km 범위로 추정하였다.[16][17]

고치현 남서부 해안을 따라 해안 침수 높이는 평균 7.7m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최대 10m에 달했다.[19] 특히 구레와 고치현에서는 25.7m, 타네자키에서는 23m의 침수 높이를 기록했다.[20]

4. 1. 쓰나미 높이

호에이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는 보소반도에서 규슈에 이르는 넓은 태평양 연안 지역을 덮쳤으며, 이세만, 분고 수도, 세토 내해, 오사카만 등 내해까지 영향을 미쳤다.[327] 시모다에서는 5-7m, 기이반도에서는 5-17m, 아와에서는 5-9m, 도사에서는 5-26m의 쓰나미가 덮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도사만 지역의 피해가 컸다.[328]

나가사키, 제주도, 상하이에서도 쓰나미 피해 기록이 있으며,[247] 청나라 기록에는 "강물이 갑자기 세차게 흘렀다. 지진이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329] 탐라(제주도)에서도 "지진해일이 있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330] 쓰나미 파원의 길이는 600km에 달했는데, 이는 1952년 세베로쿠릴스크 지진, 1960년 칠레 지진, 1964년 알래스카 지진 등 세계적인 거대 쓰나미와 비슷한 규모였다.[331]

2016년 시뮬레이션 연구에서는 Mw8.4-8.6을 가정할 경우, 제주도 남단 서귀포 지역에 최대 약 0.5m, 북단에는 약 0.15m 이하, 남해안에는 최대 약 0.47m의 쓰나미가 온다고 예측했다. Mw8.8-8.9를 가정하면 예측 높이가 0.2-0.4m 높아져, 남해안에 최대 0.9m의 쓰나미가 올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332]

도사에서는 지진 발생 약 1시간 후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총 11번의 파도가 몰아쳤고, 3번째 파도가 가장 높았다.[333] 이후에도 약한 쓰나미가 계속되다가 저녁 8시 이후에야 점차 진정되었다.[333]

기이반도 연안, 도사무로토, 다네자키, 스사키 등 많은 지역에서 물이 빠졌다가 쓰나미가 밀려왔다.[334] 히로 및 고보에서는 쓰나미가 천천히 들어왔지만, 물이 들어오며 인가가 유실되었다.[334][335] 오와세에서는 지진 후 쓰나미가 오기까지 밥냄비를 태울 정도의 시간이 있었고, 우물물이 말랐다가 쓰나미가 밀려왔다고 전해진다.[336][337] 나치카스우라에서도 비슷한 기록이 남아 있다.[338]

다음은 일본 각지에서 관측된 쓰나미 기록을 정리한 표이다.

호에이 지진 쓰나미 피해 상황
지역추정 쓰나미 높이 (m)
고문서 기록이마무라
(1935-40)
마시로
(1995)[339]
쓰지
(2007-15)
하토리
(1977-84)
기타
무쓰 하치노헤 (현 아오모리현 하치노헤시)
시모사 조시 (현 지바현)1-1.2[340]
가즈사 시라코 (현 지바현)1.5[340]
에도 앞바다 (현 도쿄만)1 정도[340]
사가미 오다와라 (현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마에카와 2-3[340]
이즈 하치조섬 (현 도쿄도)하치조섬 3
하치조코섬 5-6[340][341]
시모다 (현 시즈오카현)4.4[342]5.1[343]5-6[340]가키자키 6.7[245]
스루가 미호 (현 시즈오카현)3.0-3.9[343]5[344]4-5[245]
사가라 (현 시즈오카현)4.9[343]6-8?[344]
도토미 아라이 (현 고사이시)3.0[342]3.0[343]3[344]3-5[245]
시라스카 (현 시즈오카현)9.0[343]5-6[245]
다하라 (현 아이치현 다하라시)
시마 도바 (현 미에현 도바시)
도바교쿠센지 5.8[346]다카마쓰 15?
도바 24?
오와리 아쓰타 (현 아이치현)2-3[245]
이세 가와고에 (현 미에현)2.4[346]
시마 고쿠부 (현 미에현)3.5[346]7-8[347]
이세 도구 (현 미에현)8.6[346]
니에우라 (현 미에현)7-8[347]8-11[245]
안라쿠지 (현 미에현)7.3[346]
기이 오와세 (현 미에현)구키 6.3[346]오와세 8-10,
구키 5-6[347]
가타 (현 미에현)10.6[348]8-9[347]
가쓰우라 (현 와카야마현)6-7[349]
고자 (현 와카야마현)5[349]
구시모토 (현 와카야마현)5-6[349]17[350]
다나베 (현 와카야마현)3.5[349]6-7[245] 13[350][351]
히로 (현 와카야마현)해안 11
하치만구 14.3[352]
5-6[353]
사카이 (현 오사카부)2.5[354]
오사카 (현 오사카부)2.5-3[349]3[354]
3.6[355]
하리마 아코 (현 효고현 아코)3[356]3[354]
비젠 고자키 (현 오카야마현)3[356]3[354]
빈고 후쿠야마 (현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1.5[356]1.5[354]
미하라 (현 히로시마현)2[356]2[354]
스오 도쿠야마 (현 야마구치현)1.5[356]1.5[354]
이요 사이조 (현 에히메현 사이조시)1-2[354]
사누키 마루가메 (현 가가와현 마루가메시)2[356]2[354]
다카마쓰 (현 가가와현 다카마쓰시)3[356]1.8[354]
아와 무기 (현 도쿠시마현)6[357]6-7[358]
아사카와 (현 도쿠시마현)6-7[357]9[225]
시시쿠이 (현 도쿠시마현)5-6[357]5-6[245]
도사 무로토 무로쓰 (현 고치현)6.5[359]7.5[360]5.5[357]6-7[245]
나하리 (현 고치현)7-7.5
아키 (현 고치현)5.6[359]아키 7-7.5
도랑 내 9-10
5[357]
야수 (현 고치현)니시야마 11-12
빈고 14-15
14-15[361]
노이치 (현 고치현)12-14
아카오카 (현 고치현)9
고치 해역15-18
다네자키 (현 고치현)23[359]11
고치 (현 고치현)5-62[357]
우사 (현 고치현)하기타니 15.7[359]7-8
하기타니 15.5-16
8[357]8-10[245]
쇼류지 (현 도사시)25[247][362]
스사키 (현 고치현)12.6[359]9
아이노고 13
간다 18[247]5-6[357]
스사키 인근안나 22.6[363]100m 정도 거슬러 올라간 것처럼 보임
구레 (현 고치현)해안 24
야키자카 25.7[359]
하치만 9-9.5
내륙 20-26
8.1[364]20-22[361]
이리노 (현 고치현)가미카와구치 7.5-8.5
니나가와 10-14
가지 17[363]8.8[364]
시모노카에 (현 고치현)13-1415[365]
오키 (현 고치현)15-16약 15[365]10[364]
시미즈 (현 고치현)1514.6[365]6.4-13.5?[364]
스쿠모 (현 고치현)5-6
스쿠모 오시마 (현 고치현)99.8[358][366]
이요 우와지마 (현 우와지마시)5[356]5.1[358]
분고 기쓰키 (현 오이타현 기쓰키시)1.5-2[367]1.5-2[354]
분고 분고 사이키 (현 오이타현)성 아래 3.5-4[367]요노즈 11.5[368]
휴가 도토로 (현 미야자키현)4-4.5[367]3[245]
히젠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현)3.5[369]2[367]
오스미 다네가 섬 (현 가고시마현 미나미타네정)7.9[369]5-6[367]6[341]


4. 2. 쓰나미 피해

호에이 지진의 피해는 주로 쓰나미로 인한 것이었다.[327] 쓰나미는 보소반도에서 규슈, 다네가섬까지 태평양 연안 지역을 덮쳤으며, 이세만, 분고 수도, 세토 내해, 오사카만 등 내해까지 들어왔다. 시모다에서는 5m-7m, 기이반도에서는 5m-17m, 아와에서는 5m-9m, 도사에서는 5m-26m의 쓰나미가 덮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도사만 지역의 피해가 컸다.[328] 나가사키와 제주도 및 상하이에서도 쓰나미가 몰려와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247]

청나라의 '호주부지'(湖州府志) 기록에는 강희 46년 10월 28일(양력 1707년 10월 28일)에 "강물이 갑자기 세차게 흘렀다. 지진이 있었다."라고 쓰여 있다.[329] 당시 탐라(제주도)에서도 탐라지에 "지진해일이 있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330] 쓰나미가 시작된 파원의 길이는 600km에 달하는데 이는 1952년 세베로쿠릴스크 지진 당시 600km, 1960년 칠레 지진 당시 800km, 1964년 알래스카 지진 당시 700km 등 세계적인 거대한 쓰나미 길이와 비슷했다.[331]

2016년 컴퓨터 시뮬레이션 연구에서는 Mw8.4-8.6으로 가정할 경우 호에이 지진 발생 약 5시간 후 제주도 남단 서귀포 지역에 최대 약 0.5m, 북단에는 약 0.15m 이하의 쓰나미가 닥쳤을 것이며, 남해안에는 최대 약 0.47m의 쓰나미가 온다고 보았다. Mw8.8-8.9라 가정할 경우 예측 높이가 이보다 약 0.2m-0.4m 높아지고, 한국 남해안 상에는 최대 0.9m에 달하는 쓰나미가 왔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332]

도사에서 쓰나미가 반시(약 1시간) 후인 미하각(14시 이후)부터 들어오기 시작해 다음날 인각 경(오전 4시 경)까지 총 11번 파도가 몰아쳤고 제3파의 높이가 제일 높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에도 약한 쓰나미가 계속 몰아쳤고 술각(20시 이후)가 지나서야 점차 진정되었다고 한다.[333]

기이반도 연안, 도사 무로토, 다네자키, 쓰자키 등 일본 내 많은 지역이 물이 쫙 빠졌다가 쓰나미가 들어왔고 기이 히로(현 히로가와정) 및 고보(현 고보시)에서는 쓰나미 파도가 천천히 들어왔지만 물이 들어오며 인가들이 전부 유실되었다고 한다.[334][335] 오와세 가타(현 오와세시)에서는 지진이 멈추고 나서 쓰나미가 몰려오기까지 밥냄비를 태울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고 하며 우물물이 말랐으며 물이 해안선에서 약 300m 떨어진 자쿠시마까지 물러났다가 쓰나미가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고 하며, 안세이 도카이 지진과는 달리 더 빠르게 쓰나미가 밀려왔다고 전해진다.[336][337] 나치카스우라에서도 비슷한 기록이 남아 있다.[338]

5. 후지산 분화

호에이 분화는 호에이 지진 발생 49일 후인 1707년 12월 16일에 발생했다.[1] 지진으로 인한 응력 변화가 화산 폭발을 유발할 수 있다는 증거가 있으며, 이는 관련 마그마 시스템이 임계 상태에 근접해 있다고 가정할 때 가능하다.[6] 1707년 지진은 후지산 아래의 마그마 굄의 압력 변화를 초래하여 정적 응력의 변화를 유발했을 수 있다.[1]

6. 경제에 대한 영향

이 지진으로 쌀값이 급등했다. 1707년 9월 14일에는 서일본에 폭풍우가 덮쳐 쌀 수확량이 예년의 60~70%로 줄었고, 히고 쌀 시세는 1석에 호에이 은 120~150목, 게이초 은 73~93몬메로 전년의 2배 정도로 폭등했다.[211] 또한 이 시기에는 이상 기후를 암시하는 기록도 있다.[211]

1707년 11월 6일, 막부는 한찰 정지령을 내려 발행처에 50일 이내에 정화(正貨)로 교환하도록 명령했다. 이 때문에 지진 피해까지 겹쳐 아와번, 아키번을 비롯한 각 번에서는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재정이 극도로 궁핍해졌고, 차입 이 누증되었다.[212]

에도 막부는 1707년 11월 20일에 사재기 금지령을 내렸다.[213][214][215]

후지산 분화에 따른 화산재 제거 비용으로, 다음 해인 1708년 2월 28일에는 "여러 나라의 고역 금령"을 공포하여 각 다이묘, 하타모토들에게 세율 100석당 2을 내도록 했다.[216] 그 결과 막부에는 40만 량이 모였다 (『오리타쿠 시바의 기』). 『두여일득』에는 호에이 5년 중에 48만 8770량, 1 870목이 모였고, 피해 지역 구제에 6만 2500량이 지출되었다고 적고 있다.[217]

1709년 3월 13일, 간조 봉행 오기와라 시게히데는 새롭게 쇼군으로 취임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노부에게 막부 재정 궁핍을 호소하며 금과 은을 개주(改鋳)하여 차익을 벌어들이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아라이 하쿠세키는 개주에 반대하며, "악질적인 것을 발행하면 천벌[218]을 받아 천재지변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라며 개주 논의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1710년 4월 4일 이후, 질이 떨어진 영자 은 등이 쇼군의 결재 없이 은밀하게 발행되었다.[219] 대지진 등 잇따른 천재지변에 대한 대책 비용으로 막부가 개주에 의한 차익을 필요로 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220] 잇따른 개주로 인해 저품위의 은화가 대량으로 발행되어 물가가 수배로 폭등했다.[211] 이로 인해 겐로쿠 문화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도쿠가와 쓰나요시 때까지의 쇼군에 의한 친정(親政)에서 오기와라 시게히데 등의 막각 정치로 변모하는 시대의 전환점이기도 했다.[221]

지진과 해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복구 비용 지출을 강요받은 기슈번에서는 번주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검소하고 절약하는 번정 개혁을 실시했고, 이는 이후 쇼군으로 취임한 요시무네에 의한 막부 재정 재건을 위한 교호 개혁으로 이어졌다.[222]

7. 재해 기념비

난카이 해곡 거대 지진인 호에이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쓰나미 퇴적물과 융기 흔적 등이 도카이 지방에서 규슈에 이르는 해안을 따라 발견되었다[198]。 피해 지역 곳곳에는 호에이 지진의 피해와 교훈 등을 새긴 재해 기념비가 있으며, 안세이 지진 등과 함께 기록된 경우도 적지 않다.[207][208]

위치내용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 요코스카 항구 터융기 흔적[103]
하마나 호쓰나미 퇴적물[90]
시즈오카현 고사이시, 나가야시키 유적층 두께 50cm - 1m에 달하는 쓰나미 퇴적물[199]
미에현 토바시 아이사쓰나미 퇴적물[200]
미에현 키이나가시마초쓰나미 흔적[201]
시오노미사키, 이즈모자키 및 아라후네자키생물 유해 군집 조사, 융기에 의한 이수 흔적[202]
하시구이 바위쓰나미의 높은 유속에 의한 거암 이동, 보에이 지진 및 1361년 쇼헤이 지진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203][204]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 이케지마・후쿠만지 유적18세기 전반 사맥[90]
도쿠시마현 미나미초, 타이노하마 연못쓰나미 퇴적물[56]
무로토곶18세기 전반 해안 단구[52]
고치현 토사시, 카니가이케50cm에 달하는 쓰나미 퇴적물, 이를 넘어선 서기원년경의 쓰나미 퇴적물도 있음[56]
오이타현 오이타시 나가하마, 오토모 씨 유적2014년 11월 분사 흔적 발견, 이 지진 또는 1596년(분로쿠 5년, 후에 게이초로 개원) 게이초 분고 지진에 따른 액상화 흔적으로 추정[205]
오이타현 사이키시, 마고에 류진 연못쓰나미 퇴적물[206]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 시바카와정호에이 대지진 공양비 - 붕괴된 하쿠쵸산을 향해 건립.
미에현 도바시 쿠니사키정조후쿠지 쓰나미 유실탑 - 묘오 쓰나미 이후 고지대로 이주, 피해 최소화.
미에현 미나미이세정 카와우치지장보살 입상 - 해발 38m 지점에 건립.[209]
미에현 기이나가시마정루리코산 요카이인 경신비
미에현 미나미이세정 니에우라사이묘지 다이조쿄 비
미에현 기이나가시마정붓코지 쓰나미 유시탑
미에현 미나미이세정 코와우라삼계만령 - 육지에 3장(9m 이상) 쓰나미가 밀려와 민가 유실.
미에현 오와세시 키타우라초 마고시경총 삼계만령 - 2007년 300주년 법요 거행.
와카야마현 스사미정 슈사미쇼넨 겐신 거사 묘비
와카야마현 스사미정 슈사미호쿄인탑
와카야마현 시라하마정토미타 곤겐 히 신사·쓰나미 경고판
와카야마현 타나베시 신조정호에이 쓰나미 비
와카야마현 이나미정고파 익사 영혼 묘비
와카야마현 이나미정인테이지 합동 위패
오사카부 오사카시 나니와구 다이쇼 다리 석비대지진 양강구 쓰나미기 - 안세이 쓰나미에서 148년 전(만 나이) 호에이 쓰나미 교훈 활용 못함.
도쿠시마현 카이요초 아사카와아사카와 관음당 - 쓰나미 희생자 공양.
도쿠시마현 카이요초 토노우라토노우라 대암 게이초 호에이 쓰나미 비 - 게이초 쓰나미와 함께 기술.
고치현 고치시 니이다쓰나미 지장 - 쓰나미 역상 지점.
고치현 오치정호에이 지진에 의한 천연 댐 재해비, 시바오 한 그루 삼나무 - 산체 붕괴로 천연 댐 형성, 침수.
고치현 토사시 우사정하기야 명호비 - 안세이 쓰나미와 함께 기술.
고치현 스사키시호에이 쓰나미 익사지 묘 - 연못에 시체 뗏목처럼 흘러 들어간 쓰나미 피해 참화 기술.
고치현 나카토사정구마노 신사 진재비 - 백봉 쓰나미·안세이 쓰나미와 함께 기술.
고치현 구로시오정 오가타 이리노이리노 가모 신사 진재비 - 안세이 쓰나미와 함께 148년 전(만 나이) 호에이 쓰나미 기술.
고치현 토사시미즈시 나카하마 고개이케가 묘비 - 안세이 쓰나미와 함께 기술.
고치현 스쿠모시 오시마 하이타카 신사조위비 - 돌계단 39번째 계단까지 침수. 마을 유실.


8. 한국에 대한 시사점

『양벌 연대기』일본어 기록에 따르면, 1707년 10월 14일 도카이도 대지진으로 대지가 갈라지고 해일이 발생했다. 같은 해 11월 4일에는 후지산 기슭 스바시리 촌에서 산이 불타 백일이 밤과 같았고 모래가 비처럼 내렸다고 한다.[210] 『삼화도휘』에는 1707년 10월 4일, 고키나이를 비롯해 도카이도, 난카이도에 대지진이 발생했으며, 특히 고키나이가 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1월 23일에는 후지 스바시리에서 불이 타올라 진동이 번개와 같았고, 토사가 비처럼 내려 인근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이로 인해 쌀값이 급등했다.[211]

이러한 자연재해는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07년 8월 19일에는 서일본에 폭풍우가 덮쳐 쌀 수확량이 예년의 60~70%로 줄었고, 히고국 쌀값이 전년의 2배로 폭등했다.[211] 지진과 해일로 피해를 본 도쿠시마번, 히로시마번 등은 재정난을 겪었다.[212] 에도 막부는 사재기 금지령을 내리고,[213][214][215] 화산재 제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걷었다.[216]

이러한 상황은 겐로쿠 문화의 종말과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대에서 막각 정치로의 전환을 가져왔다.[221] 기슈번에서는 번주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검소와 절약을 강조하는 번정 개혁을 실시했고, 이는 이후 교호 개혁으로 이어졌다.[222]

난카이 트로프 거대 지진은 100년에서 200년 주기로 반복되므로, 다음 지진과 해일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22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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